사진 배운 적 없는 90년생 사진가…루이비통과 담은 '몽환적 서울'

입력 2023-06-01 18:08   수정 2023-06-05 13:55


사진은 순간의 기록이다. 멈추지 않는 시간의 한 단면을 움켜잡아 사각 프레임 안에 박제한다. 모두가 카메라를 손에 넣고 다니는 시대. 이 기록의 행위가 예술이 되는 조건이 있다. 시각적으로 파격적인 아름다움을 창조하거나 익숙하던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 이 조건들을 온전히 충족시켜 패션계를 놀라게 한 1990년생 사진작가가 있다. 네덜란드 출신 사라 반 라이다.

반 라이는 사진을 배운 적도, 예술을 전공한 적도 없다. 어릴 때부터 텀블러와 플리커 등의 이미지 플랫폼에서 사진을 수집하고 큐레이션한 게 전부다. 처음 카메라를 산 건 스물두 살 때. 그 뒤로 그는 세상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피사체를 좇아 수많은 도시를 걸었다. 몽환적이고 감각적인 그의 사진엔 평범한 사람이나 사물도 유독 비밀스럽고 신비롭게 담긴다. 지난 10년간 반 라이는 세계적인 미디어, 럭셔리 브랜드가 찾는 사진작가가 됐다. 도시, 정물, 꽃, 자화상 등 개인 작업 시리즈들을 본 뒤 협업 제안이 끊이지 않았다. 뉴욕타임스, 보그, 샤넬, 에르메스, 디올, 자크뮈스 등이 그랬다.


1년 전 루이비통은 그에게 여행 사진 시리즈 ‘패션 아이’ 컬렉션을 제안했다. 패션 아이는 1845년 창립 이후 ‘여행의 예술(Art of travel)’을 브랜드 철학으로 삼아온 루이비통이 8년째 선보이는 여행사진집. 올해 출간하는 서울편을 패션 사진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담아 보자는 얘기였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 와본 적 없던 반 라이는 그렇게 작년 초여름 15일간 서울에 머물렀다. 북촌의 작은 한옥에서 지내며 서울 구석구석의 이야기를 들었고, 수백 장의 사진을 남겼다. 그의 사진들은 2일부터 한 달간 서울 회현동 피크닉 별관에 전시된다. 1년 만에 서울을 다시 찾은 그를 지난달 31일 전시장에서 만났다.


“1년 전에 낯설기만 하던 서울이 이제 익숙한 곳이 됐네요. 서울에 처음 와서 놀란 것이 있습니다. 화려한 첨단 기술로 포장된 모던한 도시 곳곳에 남아있는 ‘본질’들이었어요. 도심 속 작은 골목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여전히 지금 서울을 만든 과거의 시간을 찾을 수 있었지요.”


그는 그림을 그리듯 사진을 찍는다. 아이폰과 카메라를 번갈아 사용하며 “나의 캔버스를 어떻게 채울지 카메라라는 붓으로 고민한다”고 했다. 서울에서 그의 눈을 사로잡은 건 아직 서울에 남아있는 과거의 시간이었다. 을지로에서 바닥재를 다듬는 사람, 경복궁 돌담 사이를 걷는 이들, 중절모를 쓰고 걷는 할아버지, 낙원상가에서 쉬고 있는 어른들, 영화관의 오래된 간판, 한강의 야경까지 그의 손에서 오래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포착됐다. 일부 작품에선 서울의 옛 모습을 흑백 사진으로 기록한 한영수 작가(1933~1999), 컬러 사진의 대가로 도시 풍경을 담아낸 사울 레이터(1923~2013)의 작품이 연상되는 지점이 있다.


“암스테르담과 파리를 오가며 살고 있는데, 한국인 친구들이 항상 ‘한국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그냥 막연하게 알려진 이미지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가보면 알 것이다’라고 했어요. 그 말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신의 고향을 그렇게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와보니 알겠더군요. 왜 그렇게들 말했는지.”


사진을 한번도 배운 적 없는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준 건 어머니 아버지와 가족이다. 음악과 연기를 전공한 어머니는 어린 시절 그의 형제들에게 늘 예술과 함께하는 삶을 선물했다. 학자인 아버지는 예술을 직접 하진 않지만 낭만적인 눈으로 자연을 관찰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주었다고. 그의 언니 로즈 역시 사진작가로, 동생 안나는 음악가의 삶을 살고 있다.

“세상의 좋은 이미지들을 인터넷에서 모두 볼 수 있는 유년기를 보낸 저에겐 컴퓨터 속 세상, 아트디렉터로 일했던 잡지사 경력(4년)이 모두 대학과 다름없었어요. 어릴 때부터 봐온 클래식 영화와 수많은 그림, 연극의 장면들이 모두 작업에 투영되는 것 같습니다.”


그의 작업엔 물과 창문에 비친 사람과 그림자, 과장되게 클로즈업된 사물과 실루엣이 존재한다. 뉴욕처럼 상징물이 많고 복잡한 도시일수록 더 단순한 이미지로 표현하기도 한다. 후보정 작업을 최소화하고도 색상과 크기의 대비를 극단적으로 구현한다. 시간성과 공간성을 삭제해 초현실적인 사진을 만들어내는 작업도 탁월하다. 루이비통과의 작업 역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여기가 내가 아는 2022년의 서울이 맞는가’ 하는 의문을 던지게 한다. 패션 아이-서울 프로젝트는 55㎜ 자이스 수동 렌즈와 아이폰(2점)으로 촬영됐다. 그는 “좋은 장비가 꼭 좋은 사진을 만드는 건 아니다”고 했다.

“어떤 것을 담고 싶은지, 어떤 구도로 이미지를 전달하고 싶은지가 작가에게 더 중요하죠. 파리 뉴욕 등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도시일수록 카메라를 매개로 한 ‘그 도시와 나의 관계’가 더 강력한 힘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반 라이는 요즘 멈춰있는 이미지를 넘어 단편영화 제작을 준비하고 있다. 어떤 예술가로 남고 싶냐고 물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어떤 장르나 분야의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진 않다는 겁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도시의 디테일을 ‘시적인 방법’으로 기록해가는 일을 계속할 겁니다.”

김보라 기자/ 사진=루이비통·Sarah Van Ri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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